구석기부터 근현대까지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영덕 이야기
1. 태초의 파도가 빚어낸 영덕의 여명 선사시대
영덕은 단순히 대게로만 유명한 곳이 아닙니다. 이곳의 흙 한 줌, 바위 하나에는 수만 년 전 인류의 흔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영덕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병곡면 영리 유적에서 발견된 뗀석기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이 푸른 해안선을 따라 삶의 터전을 일구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영덕은 본격적인 주거지의 형태를 갖춥니다. 지품면과 강구면 일대에서 발견되는 지석묘(고인돌)들은 당시 이곳에 강력한 부족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바위를 옮겨 무덤을 만들 정도의 조직력과 경제력을 갖춘 집단이 동해의 풍요로운 해역을 배경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시기 영덕은 이미 바다와 육지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기틀을 닦고 있었습니다.
| < 영덕 옛 가옥들의 마을 풍경 > |
2. '야성'과 '우시산국'의 혼이 깃든 삼국시대
삼국시대로 접어들며 영덕은 역사서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영덕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힘이 교차하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야성' 또는 '우시산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나, 신라가 북진 정책을 펼치며 이곳은 신라의 중요한 군사 거점이 됩니다. 영덕의 옛 지명 중 하나인 '야성'은 '들판의 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광활한 동해와 배후의 산지가 만나는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신라 지증왕과 진흥왕대를 거치며 영덕은 동해안 북상로의 핵심 관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울릉도(우산국)를 정벌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서의 기능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의 영덕은 신라의 찬란한 불교 문화와 동해의 토착 신앙이 결합하며 독특한 지역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 야성: 영덕의 옛 이름으로, 삼국시대 신라가 북진하며 이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동해안의 비옥한 들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토착 세력을 의미합니다.
✔ 우시산국: 영덕과 울산등 동해안 일대에 자리 잡았던 진한의 소국으로,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바다를 생활 터전 삼아 독자적인 정치 체계를 유지하던 부족 국가입니다.
3. 태조 왕건의 감탄과 '영덕'이라는 이름의 탄생
영덕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고려 시대입니다. 후삼국 시대,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다툼 속에서 동해안을 순시하던 중 영덕의 예주(현재의 영해면)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왕건은 영덕의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인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고려 현종 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예주'라 불리며 동해안의 행정 중심지로 격상되었습니다. 특히 영덕의 특산물인 대게가 왕의 수라상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그 맛이 가히 일품이라"는 칭송과 함께 영덕 대게의 명성은 고려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고려 중기 유학의 대가인 이색 선생이 영해 괴시리에서 태어난 것은 영덕이 단순한 변방이 아닌, 높은 수준의 학문과 정신문화를 간직한 곳이었음을 시사합니다.
| < 영덕 가릇배 이동 > |
4. 유교의 향기와 선비의 절개가 살아 숨 쉬는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영덕은 '선비의 고장'으로 거듭납니다. 영해 부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대부가 거주하며 영남 유학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괴시리 전통마을이나 인량리 전통마을은 당시 영덕 사대부들의 격조 높은 삶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학문의 고장이었던 영덕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용맹한 땅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영덕의 의병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왜군을 격퇴하며 동해안 보급로를 차단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조선후기에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른 절개와 충절이 강조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도 영덕 출신 인물들이 강직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바다의 역동성과 산의 단단함이 영덕 사람들의 기질속에 녹아 들어, 부드러우면서도 꺾이지 않는 선비 정신을 완성한 것입니다.
5. 구국의 일념으로 타오른 영덕의 항일 투쟁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영덕은 전국에서 가장 뜨거웠던 항일 운동의 성지였습니다. '평민 의병장'으로 추앙받는 신돌석 장군이 바로 영덕 출신입니다. 그는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며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군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양반 중심의 의병 활동에서 벗어나 민중이 주체가 된 항일 투쟁의 상징이 영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도 영덕의 함성은 유독 컸습니다. 영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경북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이는 영덕 사람들이 가진 강인한 공동체 의식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영덕의 바다는 이들의 눈물과 피를 기억하며 오늘날까지 푸르게 빛나고 있습니다.
| < 영덕 일제강점기 > |
6. 시련을 딛고 희망을 낚는 현대의 영덕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영덕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영덕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사투였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은 어린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이루어낸 값진 승리의 기록이며, 영덕은 그 아픔을 위로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추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영덕은 이러한 고난의 역사를 밑거름 삼아 동해안 최고의 관광 도시로 발돋움했습니다. 강구항을 중심으로 한 수산업의 발전은 물론, 블루로드라는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를 통해 전국의 여행객들에게 쉼표를 선물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성곽 유적과 현대의 풍력 발전 단지가 공존하는 모습은 영덕이 지닌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7. 시간을 걷는 여행자를 위한 마무리
영덕은 단순히 먹거리가 풍부한 관광지를 넘어, 수만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인 '살아있는 박물관'입니다. 선사시대 인류의 생존 투쟁부터 고려와 조선의 찬란한 문화, 그리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던 의병들의 외침까지. 영덕의 해안선을 따라 걷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기개를 확인하는 여정과도 같습니다. 푸른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우리는 그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풍요를 일구어낸 영덕 사람들의 지혜와 용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영덕을 흐르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이번 주말, 역사와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영덕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그곳의 바람과 바다가 잊지 못할 시간과 기억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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