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풍금 소리와 뗏목 도시락이 건네는 "그땐 그랬지"
1. 백제 땅에서 만난 뜻밖의 타임슬립, 추억의 문을 열다
부여 여행을 하면 보통 정림사지나 낙화암 같은 웅장한 백제의 역사를 먼저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저 역시 사비 백제의 흔적을 쫓아 부여에 왔다가, 규암면 도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부여 생활사박물관'의 간판에 이끌려 핸들을 돌렸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퀴퀴하면서도 정겨운 옛날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데, "아, 여기 제대로 찾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이곳은 국가가 운영하는 정제된 박물관이라기보다, 한 수집가의 평생이 담긴 거대한 보물창고 같은 느낌입니다. 화려한 국보 대신 손때 묻은 다이얼 전화기와 찌그러진 양은 냄새가 반겨주는 이곳에서, 저는 1,400년 전 백제보다 더 뜨거웠던 우리 부모님의 청춘을 먼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2. 2만 점의 집념이 만든 풍경, "이거 기억나?"의 연속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정말 발 디딜 틈 없이 유물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대략 2만 점이 넘는다고 하는데, 단순히 물건을 나열한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옛날 이발소의 회전 간판, 드르륵 소리가 날 것 같은 전당포 창구,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뚱뚱한 브라운관 텔레비전까지. 전시 구역을 지날 때마다 "맞아, 우리 집에도 이거 있었는데!"라며 옛날 우리집이 생각나고, "엄마가 이거 절대 만지지 말라고 했었지" 하는 혼잣말이 계속 터져 나옵니다.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 카페나 세트장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세월을 이겨낸 물건들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공간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레트로 좋아하는 저에겐 너무 좋은 공간들입니다.
3. 나무 책상과 난로 위 도시락, 그 시절 교실의 온도
가장 마음이 뭉클했던 곳은 단연 '추억의 교실' 코너였습니다.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 교실 안으로 들어가니, 제 몸보다 작아 보이는 나무 책걸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교실 한가운데 놓인 무쇠 난로, 그리고 그 위에 층층이 쌓인 양은 도시락들을 보니 괜히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더군요. 예전 크게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작게 보입니다.
난로 맨 밑바닥 도시락은 누룽지가 생겨 제일 맛있었다던 아버지의 이야기가 떠올라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교실 구석에 놓인 낡은 풍금 건반을 조심스레 눌러보니,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낮은 음이 새어 나오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따뜻하던지요.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할 풍경이겠지만, 그 시절의 좁은 교실은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꿈을 꾸던 공간이었음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4. 만화방과 장난감 천국, 잃어버린 동심을 찾아서
교실을 나와 이어진 골목길 구역에는 누렇게 빛바랜 만화책들이 가득한 만화방이 있었습니다. 한 권에 몇십 원 하던 시절, 엎드려서 만화책을 보며 낄낄거렸을 소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옆 코너로 넘어가면 장난감 수집가들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고전 장난감들이 즐비합니다. 철제 로봇부터 종이딱지, 못난이 인형까지. 지금처럼 스마트폰 게임은 없었어도 골목길에서 땀 흘리며 놀던 그 시절의 에너지가 유물들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듯했습니다. 전시물들을 유리창 너머로 멀리서 보는 게 아니라 바로 코앞에서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어, 마치 드라마 세트장 속에 직접 들어와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적 순수함이 생각나고, 괜히 마음이 울컥하기도 합니다.
5. 투박하지만 진실한, 우리 삶의 궤적을 기록하다
부여 생활사박물관은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은 아닙니다. 어떤 곳은 동선이 좁아 조심조심 걸어야 할 때도 있죠. 하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이 박물관의 정체성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고쳐 쓰고, 아껴 썼던 물건들이야말로 가장 진솔한 역사의 기록이니까요.
화려한 백제 문화유산들이 '우리의 뿌리'를 알려준다면, 이곳 생활사박물관은 '우리의 오늘을 만든 어제'를 이야기해 줍니다. 낡은 타자기와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버스 안내양의 가방까지.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은 그 어떤 역사 강의보다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백마강의 바람을 쐬고 난 뒤, 잠시 이곳에 들러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것은 부여 여행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기본 정보
- 전화번호: 041)832-0041
- 주소: 충남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로 553(규암면 호암리 210-2)
- 운영시간: 10:00~15:00(격주 수요일 정기휴무)
- 입장료: 어른 3,000원 / 청소년,어린이 2,000원
- 주차: 전용주차장
- 부여 생활사박물관 위치정보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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