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자락에 숨겨진 김시습의 마지막 안식처와 천년의 미학
부여를 여행한다고 하면 대개 정림사지나 궁남지의 화려함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부여 시내를 조금 벗어나 외산면으로 차를 달리다 보면, 마치 시간이 겹겹이 쌓여 멈춰버린 듯한 고요한 산사를 만나게 됩니다. 백제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바로 만수산 자락에 자리 잡은 무량사입니다.
'무량'이라는 이름처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생명이 깃든 곳. 이곳은 단순히 오래된 절을 넘어, 조선의 천재 문학가 김시습이 평생의 방랑을 끝내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무량사의 매력을 깊숙이 들여다보겠습니다.
1. 압도적인 웅장함 속에 담긴 반전, 극락전의 미학
일주문을 지나 계곡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드디어 무량사의 중심인 극락전(보물 제356호)이 그 위용을 드러냅니다. 처음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그 독특한 모습에 시선을 뺏기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2층 구조의 불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 때 일어납니다. 밖에서 보기엔 층이 나뉜 것처럼 보였는데, 내부는 위아래가 하나로 탁 트인 통층 구조입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거대한 목조 건축이 주는 공간감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백제의 건축양식에 또한번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 높은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아미타여래삼존상이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밖에서 보던 웅장함이 안에서는 경외심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거대한 불상 앞에 서면, 걱정거리들이 참으로 작게 느껴지는 묘한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 < 부여 무량사 극락전 > |
2. 매월당 김시습, 천재의 고독이 머문 자리
무량사 마당을 거닐다 보면 유독 한 인물의 그림자가 짙게 느껴집니다. 바로 매월당 김시습입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해 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되어 산천을 유랑했던 그는, 생의 마지막 2년을 이곳 무량사에서 보냈습니다. 세조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그당시 죽음을 각오하였을 것 같습니다.
사찰 한쪽에 자리한 '영정각'에는 그의 초상화(보물 제1497호)가 모셔져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 익숙한 얼굴이지만, 그가 생을 마감한 현장에서 마주하는 초상화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찌푸린 미간과 고독한 눈빛 속에는 시대를 앞서갔던 천재의 고뇌가 그대로 서려 있습니다.
그가 이 마당을 거닐며 바라보았을 만수산의 능선, 그리고 그가 남긴 "부질없는 명성을 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속도에 지친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가 왜 그토록 많은 산천 중 이곳 무량사를 마지막 안식처로 삼았는지, 사찰의 고요한 공기를 들이마시다 보면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 < 부여 무량사 아미타여래삼존상 > |
3. 세월이 빚어낸 돌의 질감, 오층석탑과 석등
극락전 앞마당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오층석탑(보물 제185호)과 석등(보물 제233호)은 무량사의 미학을 완성하는 조연들입니다. 이 석조물들은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박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강하죠. 다른 석조물들과 같으면서 다른것 같은 단단함이 느껴집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된 돌의 모서리와 그 위를 덮은 이끼는 인위적인 예술품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시간의 힘'을 보여줍니다. 석등의 불빛이 어둠을 밝히고, 석탑의 그림자가 마당에 길게 드리워질 때 무량사는 가장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석탑 주변을 천천히 돌며 마음속의 소원을 빌어보거나, 잠시 석등 아래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명상이 됩니다.
| <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 |
4. 만수산 숲길, 마음을 씻어내는 산책로
무량사 여행은 사찰 내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무량사를 감싸 안은 만수산 산책로는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냅니다. 특히 일주문에서 사찰로 이어지는 전나무와 느티나무 길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 일품입니다.
여름에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식히기 좋고, 가을에는 온 산이 붉게 물들어 극락전의 단청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가 살짝 내린 뒤, 산안개가 낮게 깔린 무량사를 좋아합니다. 촉촉하게 젖은 흙냄새와 함께 전해지는 산사의 향기는 도심의 스트레스를 씻어내기에 충분합니다.
5. 역사와 쉼이 공존하는 공간
무량사는 단순히 구경하는 관광지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는 공간에 가깝습니다. 거대한 불상 아래서 나의 작음을 깨닫고, 김시습의 삶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되새기며, 숲길을 걸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는 과정. 그것이 무량사가 방문객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부여 여행의 경로를 짜고 있다면, 반나절 정도는 온전히 무량사에의 시간을 보내 보시길 바랍니다. 일주문을 나설 때쯤이면, 들어올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절이 주는 편안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댓글
댓글 쓰기